NanohA Horizon #1. 린디씨, 그 젊음의 비결! 낙서들



우미나리시市.
여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타카마치가家의 찻집은 오늘도 만석이다. 아기자기한 케이크와 과자를 비롯해 카페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미도리야는 달달한 디저트라면 언제나 사양치 않는 여학생들과 지켜보면 퍽 눈꼴사나운 알콩달콩한 연인, 그리고 가사라는 짐을 잠시 집안에 내려놓고 수다를 떠는 주부들까지 찾아드는 우미나리 나름의 명소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내부의 테이블은 물론이요, 가게의 밖에 놓인 야외의 자리까지 손님으로 가득한 문전성시.

“응응, 그래서 말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말도 안 돼. 그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이 끝나버렸다고!? 그 오빠란 작자, 멍청할 정도로 둔해 빠졌어! 속옷만 걸친 페이트를 눈앞에 두고 그냥 넘어가다니! 아아, 너무 답답하잖아?”
“아리사, 진정해. 크로노군은 그럴 사람이 아닌걸.”

가게가 대성황인 상황과는 별개로 미도리야의 안쪽 구석진 테이블에서는 하루의 일과를 끝마친 네 명의 소녀—주로 과격한 행동을 하는 쪽은 투 사이드 업의 진한 금발의 소녀였고 나머지 3인은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며—가 언성을 높였다 낮추길 번갈아 가며 한참 수다에 빠져 있었다. 내용인즉슨 그녀들 중 한 명의 오빠에 대한 이야기였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일상이라든가,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던 취미라든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라든가, 지극히 사적인 내역이었지만 워낙 그녀들이—사실 아리사 뿐이었지만— 끈질기게 물어보는 지라 나노하와 페이트는 결국 둘을 뿌리치지 못한 채 미도리야까지 끌려와 버린 것이다.
하기야 통칭 「어둠의 서」 사건 당시 스즈카와 아리사는 어쩌다 보니 사건에 휘말린 단순한 일반인이었으니 그만큼 모르는 것도 많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을 터.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소녀들에게 모든 전말을 설명하기까지는 퍽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노하가 처음 유노와 만나게 된 경위와 쥬얼 시드를 놓고 벌어졌던 싸움. 그리고 그 뒤에 야가미가家와 무기를 겨누고 피와 눈물과 슬픔을 가슴속에 새기게 된 일까지.
물론 그녀와 함께 했던 페럿 비스무리한 동물이 유노라는 사실은 페이트와 입을 맞춰 어찌어찌 마음속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한 스즈카와는 달리 아리사는 만약 온천과 목욕탕을 같이 들어갔던 동물이 알고 보니 동년배의 남자애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분명 유노는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는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

“딱히 페이트를 의식하지 않는 쪽이 더 편하지 않을까. 오히려 크로노씨가 페이트를 신경 쓴다면 더 불편할지도.”
“……으응.”

스즈카의 반응에 약간은 실망한 듯한 페이트를 뒤로 한 채, 아리사는 한층 더 흥분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린디씨는 어떤 사람이야?”
“에?”

생각지 못한 밤색의 소녀가 던진 질문에 허를 찔린 듯한 페이트.
그녀가 아는 것은 린디 제독이 크로노의 친모이자 10년도 한참 전에 남편을 떠나보낸 안타까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과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자녀의 뒷받침도 빼먹지 않는, 현모양처의 여성이라는 사실뿐. 아직은 촉탁 마도사라는 신분으로 아스라에 적을 두고 있으나 함장인 린디와 사적인 접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실상 그녀와 나눈 대화라고는 업무와 관련된 몇몇 짧은 몇 마디가 전부였다.
아스라의 제독으로서도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도 완벽에 가까운 린디 하라오운. 나노하가 모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장 친한 친구며 수양딸인 페이트에게 언젠가 한 번쯤은 듣고 싶었고, 지금보다 더 적절한 기회는 없었다.

“나도 많은 걸 아는 건 아니야. 알고 있는 것만 알 뿐.”
“그것뿐이라도 말해주지 않을래? 실은 나 린디 제독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알았어. 우선———,”
“에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나노하의 궁금증이 해결되려는 찰나, 산통을 깨는 이는 다름아닌 아리사였다.

“어, 어째서?”
“페이트의 표정을 보라구. 보나 마나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들어볼 이유가 어디 있다는 건데?”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페이트가 어머니에게 흠이 될 법한 이야기를 하진 않을 테니까.”

성이 차지 않는지 콧방귀를 내뿜는 아리사와 그 말에 맞장구치는 스즈카까지. 아무래도 그녀가 듣고 싶었던 것을 듣기에는 이미 틀린 모양이라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뱉는다. 그런 나노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흉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질문을 꺼내 들었다.

“혹시 말이야……, 린디씨의 젊음에 대한 비결에 대해 하는 건 없어?”
“젊음에 대한……, 비결?”

나머지 세 명의 소녀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다같이 아리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페이트의 오빠는 이제 14살이라며? 우리보다 5살이나 위라구. 그런데 봐봐. 린디씨를 누가 크로노 같은 아들이 있을 나이로 생각하겠냐고. 솔직히 조금 과장해서 미유키 씨나 시노부 씨보다 약간 연상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잖아? 나노하, 미안.”
“가, 갑자기 왜 사과를 하는 거야?”
“솔직히 모모코 씨도 동안이고 굉장히 아름다우시지만 린디 씨의 동안은 모모코 씨보다 한 수 앞선다고 봐. 나노하와 크로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분명 모모코 씨보다도 연상일 텐데 말이지.”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아리사도 대단하네.”
“그러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하지만 그런 점이 또 아리사답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아리사가 아니니까.”

칭찬 같으면서도 칭찬 아닌 칭찬에 아리사는 잠시 인상이 찌푸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는 한창 자신의 호기심에 불타오르고 있다.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대형 화재의 현장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고 만다는 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세 소녀들이었다. 폭주하는 아리사는 어떻게 보면 쥬얼 시드나 어둠의 서에 필적할 만한 로스트 로기아니 그냥 제 풀에 지쳐 열기가 잦아들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나노하와 페이트 둘 다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글쎄. 나는 아직 촉탁 마도사인데다가 마주칠 기회도 적고 들은 이야기도 없는데. 가족인 페이트는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어때, 페이트?”

세 명의 시선이 한 소녀를 향해 모인다. 거기에는 애매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차를 들이켜는 페이트가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꺼낼 만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른 두 소녀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추가로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떼를 쓰기 시작한 버닝스가家의 자녀는 덤이다.

“재미있을지도, 재미없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지만 괜찮겠어?”


―――


신력 56년.
아직 흑의의 집무관이 집무관은커녕 이제 막 마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무렵의 이야기.
차원항해부대 순항 L급 8번함 아스라는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지정유실물로스트로기아을 회수하라는 임무를 마치고 관리국으로 귀환하는 길이었다. 유물의 위험도는 A랭크. 근래 몇 개월 동안 거두어들인 물건들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등급이지만, 본부에서 전송한 정보에는 악용할 경우 S랭크 이상의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하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함장.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으신가요?”
“별거 아냐. 갑자기 옛날이 떠올라서 말이야.”

굳은 얼굴의 그녀를 걱정스러워 안부를 묻는 오퍼레이터의 말에 린디는 적당히 둘러대며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물론 그것이 구석진 마음속 한편에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행동임을 오퍼레이터는 알지 못했다.
통칭 「에스티아」 사건.
2년 전 2번함 에스티아가 침몰하는 것을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악몽을 그녀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회수에 성공한 1급 지정유실물 「어둠의 서」의 폭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잃었던가. 하루 전까지 식사를 같이했던 전우를 잃고, 친구를 잃고, 마지막에는 남편인 크라이드까지 떠나보내야만 했던 관리국 사상 최악의 사고를 어찌 그리 간단히 잊어버릴 수 있을까.
물론 린디도 그것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납득해도 마음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하는 법. 사건으로부터 한 달 후 그녀는 갑작스레 집무관이라는 직책을 내려놓곤 남편의 상사였던 그레이엄의 도움을 받아 차원항행부대바다에 몸을 의탁해 아스라의 함장에 취임했다. 그레이엄도 처음에는 극구 만류했지만 린디의 비장한 한마디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엄 제독도 여전히 어둠의 서를 뒤쫓고 있다고 압니다만. 후배의 원한을 갚으시는 것도 좋지만, 제 몫도 조금은 남겨주셔야지요. 동료와 남편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손까지 놓고 있을 정도로 무책임한 여자는 아니랍니다, 린디 하라오운은. 그 빌어먹을 저주받은 마도서를 찾아내서 소멸시키는 건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 후 함장이라는 직책으로 수많은 차원 세계를 돌아다닌 지도 벌써 3년째. 본국의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요정」이라는 별명이 더 친숙할 정도로 그녀의 명예는 드높아져 있었다.
그토록 임무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어둠의 서」의 수색과 소멸.
그러나 근 2년 동안 다양한 지정유실물을 찾아내고 회수하거나, 더러는 차원 도항자들의 문제까지 해결하면서 얻어낸 정보는 뜬소문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행여나 유실물관리부 소속이라면 보다 빨리 뒤쫓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는 이미 한잠 전에 사라진 지 오래다. 그간 그녀가 얻은 거라곤 어둠의 서를 추적하고 만다는 강박감과 초조함,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한 위궤양이 전부였다.

“목이 마르네. 알렉스, 녹차 한 잔 부탁해.”
“함장, 아직 모르셨어요? 2시간 전부터 아스라의 식수가 떨어져서 녹차는커녕 생수도 없어 모두들 침만 삼키고 있다구요.”
“그래?”

그녀를 심심치 않게 달래주는 유일한 위안거리는 평소 남편과 함께 즐겨 마시던 녹차뿐이었다. 다도를 즐기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크라이드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근대 그런 녹차를 마실 수 없으니 린디가 고를 선택지는 단 하나뿐.

“본국에 도착하기까지 예상 시간은?”
“최대 2시간, 차원 폴딩 시스템을 한계까지 중첩해도 1시간 밑으로는 무리입니다.”
“그럼 그때까지 아스라를 잘 부탁해. 당분이 떨어져서 좀 쉬어야겠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난리를 치는 오퍼레이터를 내버려 둔 채, 린디는 브리지를 떠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마도사도 없는 관리 외 세계에서 두 명의 직원만으로 로스트 로기아를 회수하고, 그들의 호위를 담당하는 한 대의 차원항행함이라……. 하여간 높으신 분들의 생각이란.’

함장실.
다다미 넉 장 반 위에서 린디는 힘없이 누운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여태까지 행해온 임무에 비하면 허탈할 정도로 손쉬운 일이었기에 조금은 맥이 빠져 버린 모양새다. 지정유실물을 노리는 반 관리국 세력은 고사하고 엄중한 보안체제가 지키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져가라는 듯 알려진 좌표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물건을, 회수할 예정이었던 이들이 회수했으니 이제 본국으로 귀환하기만 하면 깔끔하기 끝나겠지.

‘하지만 나조차도 열람할 수 없는 레벨의 에이전트라니, 냄새가 나도 너무 나잖아.’

허나 현상황과는 반대로 그녀의 머릿속은 영 복잡하기만 했다. 원인은 본국에서부터 동행하고 유물의 회수를 담당한 직원들의 신분이었다. 외무방위성 시공관리국 산하 유실물관리부 기동 2과라고 했던가. 랭크가 낮다곤 하나 엄연한 로스트 로기아인 물건을 단 두 명만으로 회수한다는 이야기를 린디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ID카드넘버로 조회한 정보는 초등학생이 귀찮다며 휘갈겨 쓴 일기만도 못한 한 두 줄의 기록이 끝. 이쯤 되면 보안이 아니라 공백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점입가경인 것은 둘을 제외한 누구도 회수한 지정유실물이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이번 임무가 유물의 회수가 아니라 요원의 보조와 지원이라고 해도, 상부의 이런 처사는 그녀가 모욕을 느끼기 충분했다.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걸. 뒷조사라도 해야 하려나.’

히가사의日傘 안쪽에 그려진 꽃잎을 세며 이런저런 잔꾀를 떠올려보는 찰나, 시소운동을 멈춘 채 물이 아닌 침묵을 담고 있는 시시오도시鹿威し의 옆으로 낯선 물체가 린디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못 보던 주전자인데……, 내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나? 자사호紫沙壺라기에는 생김새가 좀 특이한걸. 게다가 물도 좀 남아있다니……, 스태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독식하기로 할까. 어차피 여러 명이 마시기에는 부족하기도 하고 말이야.’

막무가내로 브리지에서 탈주한 것도 결국 녹차를 마실 수 없었다는 핑계가 아니던가. 직원들 몰래 몇 잔 정도 음미한 후에 돌아가 함구한다면 별 불만은 없겠지, 라는 그릇된 자기합리화를 펼치며 화로에 불을 지피고 차를 우린다.

‘아 좋아라. 역시 스트레스에는 녹차가 제격이지.’

정좌의 자세로 정도를 지키며 다도의 예를 따른다. 적당히 우러난 은은한 향기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침대보다 아늑했고 농후한 맛은 미드칠더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급 카페의 음료보다 감미로웠다. 세 시간 만에 음미하는 티타임에 몸도 마음도 나른함에 긴장이 풀려버린다. 몇 초 전까지 그녀의 속을 썩이던 고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녹아내리며 사라지고, 방은 잔잔한 평온함으로 물들어가는 찰나,

「함장! 일어나 계십니까? 혹시 함장실에 물이 담긴 주전자 비스무리한 게 있진 않겠죠?」

난데없이 긴급통신망에서 흘러나오는 다급한 목소리가 고요했던 방안의 정적을 물리친다. 설마 함장실에 감시카메라라도 설치한 것인가. 완벽했을 터인 그녀의 청사진은, 채 시도도 하기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 이거 말이야? 못 보던 물건인데 와보니 있더라고. 누군가 깜빡 잊어버린 모양이야.」

온기가 가시지 않아 아직도 따끈따끈한 주전자를 살짝 들어 올리는 린디. 그리고 그런 그녀의 차분한 태도를 바라보는 오퍼레이터의 얼굴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만 듯한 당혹스러운 낯짝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함장, 혹시 주전자에 담긴 물로 차를 내서 마신 건 아니시겠죠?」
「……미안. 목도 마르고 몸까지 찌뿌둥하길래 기분전환도 할 겸 말차末茶로 달여 마셨지. 조금 있다가 아닌 척하고 몰래 브리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들켜버렸네?」
「———X발 X됐다.」

그녀 특유의 상냥함을 담은 미소도, 그의 욕지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함장!”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

찻잔을 내려놓고 자늑자늑한 발걸음으로 돌아온 브리지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사방에는 브리지를 뒤덮을 만큼 방대한 자료화면이 널려 있었고, 천장에서는 비정상적인 접속을 알리는 경고음이 쉬지 않고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대관절 무슨 난리니?”
“본국에서 전송한 지정유실물의 정보입니다. 그들의 신상정보까지 포함해서요.”
“……그들은?”
“이미 사라진 지 한참입니다. 출항기록은 없고요.”
“시원하게 당했군. 한 방 제대로 먹었는걸.”

그래. 아무리 본국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들만 모아 놓은 똥통이라 하더라도 정신줄을 놓은 게 아니고서야 아무런 정보도 전송하지 않을 리 없지. 최소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신체에 어떤 위험을 끼치는지는 알아야 만약의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테니까.
아마 그들은 출항 전 차원항행함이 모든 시스템을 재부팅할 때 해킹에 취약한 점을 노려, 관제탑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상 서버와 연결이 되도록 손을 쓴 것이겠지. 그리곤 국원을 사칭해 편안하게 현장까지 이동해 유물을 손에 놓은 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본국에 도착하기 전에 조용히 사라질 계획이었으리라. 단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해킹이 풀려버린 탓에 이렇게 꼬리를 남긴 채 줄행랑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나마 아무런 인명 사고가 없다는 것만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뭐 요컨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라고나 할까. 이번 항해는 서막부터 결말까지 완벽하게 차원 도항자들의 손에 놀아난 셈이다.

“어쨌든 물건은 다시 회수하면 그만이야. 아스라 내부의 차원 이동 흔적은 어떻게 되지?”
“그, 그게 말입니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당연한 질문을 이상하리만큼 머뭇거리며 선뜻 답하지 못하는 오퍼레이터. 몇 초간 정적이 흐르다 식은땀을 닦아내고서야 이윽고 입을 열었다.

“린디 함장이 브리지에 오기 전까지 마시던 차가, 이번에 회수할 지정유실물이었다구요.”


———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건데?”
“차원 도항자들은 그것을 섭취할 경우 신체에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지 관찰하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야. 내부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한 ID카드의 위조까지 한 걸 보면 아마 본국에 관련자도 있었겠지.”
“관리 외 세계라면 지구와 동급인 장소잖아? 린디씨가 들이켠 물의 정체는 뭐였던 거야?
“본국의 자료로는 본래 일본의 바다 건너의 반도인 한국에 존재하는 성수라나 봐.”
“풉! 뭐, 뭐라고?”

사레가 들려 음료를 내뿜는 아리사. 그것을 뒤집어쓰는 건 온전히 나노하의 몫이었고,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는 소녀는 스즈카뿐이었다.

“지정유실물인가 뭔가 하는 그거 말이야, 쓸데없이 너무 널려있는 거 아니야?”
“코드명 무 안 단 물The Holy Water.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신화 속 이야기로는 마시면 온갖 불치병이 완치되고 몸에 바르면 소원을 이뤄준다나 뭐라나.
“페이트의 어머니도 참 엄청난 물을 마셔버린 거구만. 그게 젊음의 비결이었던 건가.”
“아무튼 그 뒤로 어머니는 본국에서 꽤나 심한 일을 당한 모양이야. 어머니의 이마에 새겨진 문양……, 나노하도 본 적 있지?”
“으응? 아, 그거 알아. 린디씨와 대화할 때 항상 시선이 쏠려서 좀 당황스럽다고나 할까.”

어린아이의 한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탄식을 내뱉고는 트윈테일의 소녀는 말을 이었다.

“혈액을 채취하고 분석한 결과 어머니의 신체에서 비정상적인 마력소의 변환효율이 측정되었다고 해. A랭크의 마도사의 변환효율이 1이라면 100 정도일까. 관리국은 며칠간 고심한 끝에 결론적으로 어머니를 생체지정유실물바이오로스트로기아로 지정하고, 미드칠더의 민간업체인 CW사에게 발주한 각종 테스트 기기와 신체정보인식시스템을 장착하기로 했대."
“……잠깐. 그거 완전 생체실험이나 마찬가지인 거 아니야?”
“하지만 어머니도 관리국의 제안에 동의한 데다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즉각적으로 파기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그다지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해.”
“아무튼 린디씨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다니 놀랍네.”

그렇게 미도리야에서 벌어진 소녀들의 담화는 끝을 맞이했다.
덧붙여 관리국 내부에 사건에 관련된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린디 하라오운의 주장은 너무나 쉽게 묵살당했다. 얼마나 높으신 분까지 손이 닿은 것인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배후를 밝혀 갚아 주리라 다짐하며, 사건번호 LL신560424 56특수882 통칭 「무안단물」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쿠루쿠루 풍경


라운드 시계

세계위치정보